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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일, 슬픈 일, 기분 나쁜 일, 더럽고 치사한 일, 모두모두 떨쳐버리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
지난 일들을 잊고 새로이 출발하려면 기분부터 풀어야겠죠? 여기 술한잔씩 돌립니다. 맘껏 드시고 행복하세요. 더불어 건강도 꼭 챙기시길~~~~ 마지막 날을 보내러 술한잔 마시러 갑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혹은 보았는지 기억은 확실치 않다. "
티비를 돌리다 잠깐 들은 것인지, 인터넷 서핑하다 우연히 본 글귀인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앞도 없고 뒤도 없어서 무슨 사연인지 알지도 못한다. 그냥 흘려듣듯, 혹은 흘려보듯 지나쳤던 한마디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혹은 보았을 때 찔끔 눈물을 흘렸지만 그려려니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며칠이 흐르면서 잊은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티비를 볼 때마다, 인터넷을 돌아볼 때마다 연말연시에 불우이웃을 도웁시다! 라는 말을 들으면 어김없이 그 한마디가 떠오른다. 그리고는 또 찔끔 눈물을 흘린다. 나도 타인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처음 다쳤을 때 친구들은 물론, 친척들, 이웃들, 그리고 많은 봉사자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그 한마디를 생각하곤 했다. 물론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가끔 외로울 때도 있지만 지나간 옛일로 여기며 쓴웃음 한번으로 흘려버릴 수 있다. 그런데 이 한마디는 좀체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다. 자꾸만 지난날의 기억을 되새기게 만든다. 떠오를 때마다 찔끔 한방울 흘리고 만다. 조금만 슬픈 드라마만 봐도 눈물이 난다. 털어내지 않는다면 내년까지도 이어질것 같다. 그래서 쓸데 없는 짓인줄 알면서 여기에라도 하소연을 남긴다. "나 이만큼 아팠는데, 이제 죽어도 돼?" 올해 아니, 그동안 살아오면서 들었던 가장 슬펐던 한마디였던것 같다. 자꾸만 눈물이 난다.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탤랜트 최진실이 희말라야에 올라 인생을 느꼈다는 글을 보았다. "
희말라야를 오르면서 어떤 생각을 했기에 인생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녀가 정말 부러웠다. 나도 산에 오르면 인생이 보일까? 눈 쌓인 부석사(맞나 모르겠다?)를 기어이 구경하고 가야한다며 튼튼한 황기록과 두 여인들이 휠체어를 밀고당기며 끙끙거리며 오를 때 내가 생각했던 것은 그저 "더럽게 힘들겠다!" 뿐이었다. 대체 어떤 경험과 생각을 하다보면 인생이 보일까? 인생은커녕 인생의 인자도 모르니, 내가 참 한신하다는 생각이 든다. 쳇! 별 희한한 여자가 기분 우울하게 만드네.......... 참 읽기 난감한 책이다.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 본문보다 주해가 더 많다. 하지만 한번쯤은 읽어볼만하다. 더욱이 최부의 행로를 따라 그려지는 자세한 주해는 지리공부하는데 제법 도움이 될 것 같다. 감상은 따로 할 것이 아니라 마침 중국사람의 평가가 있어 그대로 옮긴다. 북경대 갈진가교수의 논문...
네이버백과사전에서 옮겨왔는데, 정론이 없단다. "
한민족이라 알고 살아가는 우리는 사실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해줄 정론조차 정하지 못한 민족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미치겠다. 본문은. 색인종(黃色人種)에 속하며, 우랄-알타이어족인 원시 퉁구스의 한 갈래로, 고대 중국에서는 동이(東夷)라고 불렀던 일족이다. 한민족이 언제부터 만주와 한반도에 살았는지 그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1만 년을 전후한 신석기시대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었음을, 그들이 남긴 유적 ·유물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정론(定論)은 없으나 한민족의 조상들은 일찍부터 인류의 발상지라고 일컬어지는 중앙아시아 지방으로부터 구석기시대를 전후하여 몽골과 만주지방에까지 이동해왔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다시 새로운 신석기의 기술을 배우면서 만주지방으로부터 남하하여 반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일부는 일찍이 일본으로 옮겨가서 일본민족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다. 또, 남해안지방에는 해류관계로 부분적으로 남방계통의 민족이 흘러들어와 혼합되었고, 황해(黃海)를 건너 한족(漢族) 계통도 들어왔을 것이다. 따라서 원시시대부터 황허강[黃河] 유역의 문명이 주류가 되고 만주나 몽골의 북방계통의 것이 가미되었으며, 남해안 지방은 일본의 기타큐슈[北九州]와 서부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까닭에 그들과 같은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다. 《시경》이나 《논어》 등에는 맥(貊:貉)이 불함산(不咸山:長白山)을 중심으로 백민(白民:古朝鮮族)의 북쪽에 산다고 하였고, 《사기(史記)》를 비롯한 후대의 사서(史書)에는 이 종족을 예맥(濊貊:穢貊)이라고 하였는데, 예맥족은 연구 결과 오늘의 한민족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다. 예맥족은 고대 아시아 민족인 퉁구스족에 속하며, 만몽계통 또는 터키계통과 공통된 먼 공동조상에서 갈라진 일족이다. 예맥족은 곰[熊]을 신성시하여 수호신 ·조상신으로 숭배하던 토템족으로, 이러한 사상은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예맥족은 신석기시대의 초 ·중기부터 대륙지방에서 동쪽으로 진출하여 만주족의 조상인 숙신족(肅愼族)을 만주의 동쪽으로 몰아내면서 열하(熱河) 방면에서 한반도의 구릉지대와 헤이룽강[黑龍江] 유역을 생활무대로 하여 정착, 원시적인 생활을 해왔다. 원시사회의 토기를 보면, 이들은 만주와 시베리아로 연결되는 북방 아시아계통의 요소를 지닌 빗살무늬토기 계통과, 화북(華北)과 만주 ·몽골계의 요소가 깃든 민무늬후육토기[無文厚肉土器] 계통과, 화북계(華北系)인 주도마연토기(朱塗磨硏土器) 계통의 세 갈래 길을 택하여 이주해왔다. 이들은 그 뒤 만주 북쪽과 동쪽 지방에서 부여(夫餘)를 건설하고, 한반도 북부에 고구려 ·옥저(沃沮) ·예(濊) 등의 고대 부족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와 전후하여 한 갈래의 부족은 일찍이 남하하여 반도 남부에 자리잡았다. 이들은 오랫동안 한강(漢江) 이남에 살면서 별로 북방의 종족들과 접촉이 없는 가운데 대소의 씨족적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3한이 그것이었으며, 이들은 총수 70여 개의 부락국가를 이루고 원시생활을 해왔다. 《삼국지(三國志)》에 의하면, 이들은 말과 풍습이 서로 다르다고 하였으므로 단일종족으로 볼 수는 없으며, 또 그들의 이주 연대와 정착지도 틀린다. 따라서 그들의 문화나 풍습도 따로따로 별개의 방향으로 발전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남쪽 해안에는 해양성 종족이 다분히 표류되어 와서 살게 됨으로써 여러 갈래의 군소국이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되나, 민족의 근간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마한 목지국(目支國)의 진왕(辰王)을 맹주로 하여 부속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막연하나마 통일된 민족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중에서 4세기경에는 고대 국가인 백제 ·신라가 형성되어 북쪽의 부여계통인 고구려와 남방의 3한을 중심으로 한 한민족 계통의 신라민족으로 크게 분리되었다. 어느 민족이나 처음에는 한 종족이 여러 곳에 씨족사회를 이루고 살다가 차츰 부족국가를 이루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민족의 통일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한민족은 이와 같은 경로를 거쳐 남과 북에 부족국가를 이룬 삼국시대를 거쳐서 7세기 중기에 이르러 민족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백제만을 완전히 통합시켰을 뿐 고구려는 그 일부, 즉 남포(南浦)에서 원산만(元山灣)에 이르는 경계선 이남의 영토를 정복한 데 불과하며, 신라는 고구려의 남쪽 일부분만을 차지하고 그 유민(遺民)들을 거느리게 된 데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여기에 통합되지 않은 고구려 민족의 대부분은 한민족과 분리된 만주족이 되었다. * 통치 조직과 신분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었으나, 중앙조직은 왕 아래에 재상격인 좌보와 우보 밑에 태대형, 태대사자 등 10여 등급이 있었다. 지방조직은 4부로 나누어져 있었고, 각 부의 우두머리는 '욕산(지방 장관)'이라 불렀다. 그리고 부에 속한 성의 성주는 '처려근지' 혹은 '도사'라 불렀다. 지배 계급인 왕, 귀족, 관리 아래로는 양민, 노비, 부곡민(천민 집단)이 있었다. 신분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양민들중일부는 통치 계급에 오르기도 했으나, 빚 때문에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양민들은 포나 곡식 등을 나라에 바쳐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곡식은 빈부에 따라 1등은 한 석, 2등은 일곱 두, 3등은 다섯 두를 바쳤다. 또한 남자는 15세가 되면 나라의 각종 공사에 부역하는 의무와, 병역 의무가 있었다. * 법률 법률은 매우 엄격해서 반역자, 전쟁에서 패한 자 , 살인자, 강간범 등은 사형되었다. 도둑질한 자는 12배로 배상하게 하고, 빚을 못 갚으면 그 자녀를 노비로 삼았다. 소나 말을 죽인자는, 노비로 전락하게 했으며, 죄 지은 자는 제가 회의에서 논의를 거친뒤 처벌 하였다. * 생활 - 데릴사위 제도 남녀간의 교제도 자유로워 마음이 맞는 처녀와 총각은 서로 청혼을 한뒤, 부모가 혼인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혼인이 결정되면, 여자의 집 뒤에 서옥이라는 작은 집을 지었다. 혼인날이 되면 신랑은 신부의 집 앞에 가서 신부와 혼인하고 싶다고 세번 외치면 신부의 부모가 문을 열어주어 혼인을 허락하였다. 신부의 부모가 허락하면 신랑은 서옥으로 가서, 집 옆에 돈과 비단을 놓고, 신부와 함께 살며 신부 집의 일을 도왔다. 그러다 자식이 생기고, 자식이 자라면 비로소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 고구려인의 준비성 고구려인은 결혼 직후부터 수의를 마련하는 등 미리 장례를 준비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금, 은, 재화를 함께 묻기도 했으며, 살아 있을 때 애용하던 수레나 말을 무덤 곁에 묻는 등, 장례를 아주 후하게 치렀다. 무덤은 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화장하는 풍습도 있었다. 또한 고분의 벽에는 인물 풍속도, 사신도 등의 벽화를 그려 넣었다. * 종교 - 동맹 10월이면 고구려는 온 백성이 모여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와 춤을 추는 '동맹' 이라는 제천의 식을 행했다. - 불교 소수림왕 2년(372), 전진 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보내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 이 때 불경과 불상이 전해졌으며, 왕실을 중심으로 불교가 공식화 되었다. 고국양왕은 불교는 널리 장려했다. 이후 불교는 크게 발전하여 중국에 유학 가는 승려도 생겼다. 광개토 대왕 3년(393), 광개토 대왕은 일반 백성들도 불교를 접할 수 있도록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다. - 도교 영류왕 7년(624)에는 당나라 고조에 의해 도교가 전해졌다. 연개소문은 도교에 심취하여, 보장왕 2년(643)에 왕에게 유교, 불교, 도교가 고루 발전해야 백성들의 안녕을 가져올수 있다며, 유교와 불교보다 성하지 못한 도교에 발전을 위해서 당태종에게 사신을 보내기를 권하였다. 이리하여 보장왕은 당나라 태종에게 사신을 보냈고, 태종은 숙달을 비롯한 9명의 도사와 교리서들을 보내 주었다. - 문자 고구려는 일찍부터 중국의 한자를 받아들여 사용했는데, 유교도 한자와 함께 들어왔다. * 교육 기관 소수림왕 2년(372)엔 국립 교육 기관인 태학이 생겨, 귀족 자제들에게 유교의 경전, 문학, 무예 등을 가르쳤다. 장수왕 이후에는 지방에도 민간 교육 기관인 경당이 생겨, 평민 자제들도 경전, 문학, 궁술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교육 기관이 생겨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유학도 더불어 발전되기 시작했으며 서적도 많이 간행되었다. 역사책으로는 백여 권으로 지어진 <유기>와 영양왕의 명으로 태학박사 이문진이 만든 <신집> 5권이 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 예술 - 벽화
고구려 예술은 웅장하며 힘이 넘치는 것이 그 특징이다. 특히 고구려 미술은 고분 속에 그려진 벽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고분 벽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벽화는 강서 대묘의 <사신도> 중의 하나인 현무도이다. - 풍속도 쌍용총 벽화인 '말탄무사'
무용총 벽화인 '수렵도'
- 화가 담징 : 일본 호류 사의 '금당 벽화'는 중국의 원강 석불, 경주의 석굴암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1949년에 호류사가 불타는 바람에 벽화는 남아 있지 않다.
' 호류사의 금당 벽화 ' - 조각 작품 불상이 대부분이며, 연가 칠년명 금동 여래 입상(국보 제119호)
금동 보상 입상(보물 제333호)
금동 미륵 보살 반가상(국보 제118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 문학 작품 유리왕의 황조가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꾀꼬리 오락가락, 암수 서로 노니는데,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곰 돌아가랴 을지문덕의 5언시 그대의 신기한 책략은 천문을 꿰 뚫었고,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에 이르렀네. 전쟁에 이겨 이미 그 공이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하리?
내원성가, 명주가 등은 이름만 전해져 온다. - 음악가 중국 진나라의 악기인 칠현금을 개조해 손수 거문고를 만들어, 백여 곡을 작곡한 왕산악이 유명하다. 거문고 외에도 날라리, 대피리, 5현금, 비파, 북 등 17여 종의 악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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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렇게
by 고명윤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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